무수   나는 뽐므가 완전 하와 같다고 생각했어.

하와   진짜?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 뽐므는 내가 동경하는 캐릭터였거든. 오히려 내가 수잔 같은거야. 수잔은 내성적이고 신중한 캐릭터잖아. 난 뽐므처럼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고 나서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닌거 같아서 괜스레 서글펐거든. 그래서 그렇게 얘기해줘서 좋아.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니 나한테 뽐므와 수잔이 모두 있더라. 그사이 음악도 하고 활동도 많았으니까. 공연 다니는 뽐므의 삶도 여성을 위해 일하는 실무자 수잔의 삶도 다 공감이 갔어. 결국 내 안에 두 사람이 다 있어서 그게 기분이 좋고 반가웠어.

무수   하와가 원했던 모습이 뽐므에 가까우니까 그 시간 동안 그쪽으로 움직였던 것 같아. 난 지금의 화와를 만나니까 뽐므의 느낌이 더 있었던 것 같아. 음악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렇고 연주하면서 얘기하는 모습을 내가 봤잖아. 그 모습과 뽐므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어. 되게 강하다고 느꼈어. 수잔이 뽐므를 보는 느낌이 내가 하와를 보는 것과 비슷할거 같아. 나는 음악도 못하고 저렇게 활동하는게 뭔지 모르지만 너무 응원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뽐므가 친구와 그 주변 관계들과 함께 규정할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잖아. 그게 하와가 아르케를 만들고 동료들과 관계 맺는 방식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하와   맞아. 나도 영화를 다시 보는데 저 모습이 되게 익숙하다고 느꼈어. 처음엔 낯설었던 기억이 있거든. 영화에서 버스타고 다니면서 공연하는게 너무 힘들지 않은가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르케 전용 버스 만들어서 팝업이나 행사, 식당 같은거 하면 너무 재밌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 어디 다마스 없나 이러면서.

무수   아르케 버스 좋다! 정말 닮은 모습이 많아. 나는 어떤 모습이 비슷할까. 보면서 확 느끼지 못했는데, 하와가 보기엔 어때? 

하와   무수는 수잔과 비슷한거 같아. 수잔은 처음에 활동 같은 건 아예 할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나오잖아. 자기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것도 그냥 운이 안 좋아서 생긴 어떤 사건 정도로 여기는데, 임신 중절을 겪고 부모 집에서 눈치보면서 공장에서 돈을 벌지. 그런 세월을 거치면서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활동을 시작하고 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되게 닮은거 같아. 조용하지만 강단있게 뭔가를 계속해 나가는 과정이 비슷해.

무수   그렇게 들으니까 맞는 것 같아. 내가 정말 활동할 줄 몰랐는데 말이지…

하와   수잔이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한단 말이야. 그리고 의심하지 않아. 나는 뽐므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흔들려서 연인을 따라 이란도 갔던거 같거든. 근데 수잔은 자신이 경험한 것이 크니까, 자신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 하는 일과 활동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느낌이었어. 

무수   나는 뽐므가 이란에서 잠시 사는 모습을 보면서…여성의 삶이 뭔가를 살짝 놓거나 휩쓸리는 순간 가부장제 여성의 삶으로 다시 쉽게 들어간다는 걸 느꼈어. 뽐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 연인인 이란 남자도 프랑스에선 안그랬는데, 진짜 짜증나. 뽐므를 집에 가두고 아이만 돌보게 만들고 밥하라고 눈치 주잖아.

하와   맞아. 그래서 나도 영화를 다시 보면서 뽐므가 어떻게 다시 프랑스로 오는지 궁금해지더라고. 이란에서 뽐므가 결단을 내리고 서로 애를 따로 키우자고 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무수   따로 키우자고 말하는 것도 진짜 대박이야.

하와   지금 2025년에도 거의 불가능한 시나리오인데…진짜 급진적이다, 뽐므가 진짜 대단하다 싶더라고.

무수   뽐므가 이란으로 간 것은 사랑에 빠져서였지. 여성에게 사랑은 되게 좋으면서도 위험한 일인거 같다고 느꼈어. 특히 이성애 사랑을 했을 때.

하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압박이 진짜 커. 임신과 출산을 하면 더욱 이 제도와 관계에 종속되기 쉬워진다고 느끼는데 뽐므가 그 관계를 박차고 나오는 게 너무 통쾌했어.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선택했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걸 보여주는거 같아서. 영화를 처음에 봤을 때는 아이를 두 명 낳아서 한 명씩 각자 키우기로 하는 이야기가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영화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이런 방식도 가능하구나 싶어. 

무수   같이 활동하는 분 중에 결혼한 분도 많거든. 근데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가는 순간 뭔가 함정에 빠진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고. 그 안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고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는데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곳에 들어왔다는 감각이 있다고 해.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결혼 제도에 들어가면 나온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하와   영화에서 이런 나레이션이 나와. ‘여성들이 남자를 만나면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 계속해서 나를 위해서 살 것인지 아니면 남자를 따라 인생의 방향을 바꿀 것인지’ 이 말이 지금의 한국도 그렇고 전 지구적으로도 공고하다는 것이, 아무리 주체적으로 살려고 해도 제도적으로 묶인 관계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책무가 너무 많으니까. 거기서 여성들이 벗어나기가 아직까지 힘들구나.

무수   대안적인 관계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시도해야 하는거 같아. 여성에게 2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거잖아. 나로 살 건지, 종속되는 삶을 살 건지. 근데 나로 살기 위해서 불안정하고 힘드니까 제도도 필요하고 안전한 관계망도 필요한데,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내 삶이 사라지니까. 그 사이에 보완하는 것이 있어야 해.

하와   근데 전혀 없지…무수가 빌려준 책 <유럽 낙태 여행> 조금 읽었는데, 여성의 인권이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서는 임신중지를 할 순 있지만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안 좋다고 말해. 임신중지도 12주까지 가능한데 수술 일정을 미뤄서 못하게 한다던가...그곳에선 여성들이 평등하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다시금 보수화되는 모습도 있잖아. 오히려 오래 전에 제도적으로 성평등이 실천되는 나라니까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전제가 너무 새로웠어. 프랑스에선 페미니스트가 올드한 무언가 라는 이야기도 새롭고.

무수   그게 마음이 아팠어. 여성 인권이 충분하지 않은데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가진다고. 그러면 변화도 더 느려질거잖아. 책에 그런 이야기도 있더라고. 새로운 세대들이 변화의 역사, 페미니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느끼지만, 이건 다 투쟁해서 얻었고 목소리 내서 바꿨다는 걸 알려줘야 하는거지. 

하와   운동의 역사를 안 가르쳐주니까 현세대랑 과거 세대의 문화적 단절이 심하다고 하더라고. 도대체 학교는 뭘 알려주는 거지.

하와   떠오르는 사람은 삶의 방식으로 변화를 만드는 제주의 ‘썸띵피스’ 만든 자리타. 중학생 때 나랑 제일 친했던 사람이었어. 20대 초중반까지는 내가 서울에 오면서 꽤 자주 만났는데 자리타가 제주로 가면서 가끔 만나고 연락도 자주하진 않지. 그래도 계속 신경쓰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친구야. 자리타가 지내는 모습이 나한테 많은 영향을 줘. 또 떠오르는 사람은 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 내가 어릴 때 닮고 싶다고 생각한 여성 중 한 명이었어. 그 당시 20대 후반 정도의 나이라 되게 젊은 선생님이었지. 그림을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어서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여자인거야. 선생님과 오래 연락을 주고받고 자주 선생님이 사는 진주로 놀러가 만났어. 그러다 선생님이 간디학교를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가셔서 그 이후론 자주 보진 못해.

무수   나도 떠오르는 친구가 있는데, 페미니즘 독서 공동체 ‘들불’ 만드는 구구. 수도권에서 서로 지내지만 각자 바빠서 자주 보진 못하거든. 그래도 종종 만나서 활동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이지. 내가 모어데즈를 고민할 때 들불을 보고 배운게 많아. 당시에 내가 혐오문제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데 어떤 가치관을 주제로 내가 상상하는 모양과 비슷하게 운영하는 곳이 들불이었어. 그래서 내가 구구한테 먼저 DM 보내고 인사했던 기억이 있어. 멀리서 그 사람을 보며 활동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영향을 받았어. 그후 나도 모어데즈를 시작하면서 구구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공감을 더 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둘이 만날 땐 하소연도 많이 하고, 같이 활동하며 서로 시너지를 내기도 했지. 늘 이 사람의 삶의 궤도가 달라지는 것이 너무 궁금하고 내게 영향을 줘. 어떻게 회사 다니다가 들불을 만들었지? 그런데 지금은 여성단체에서 일한다고? 그 삶은 어떨까? 너무 궁금해.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만약 조직에 들어간다면 활동 조직으로 갈 수 있을까? 안 해봤는데 해볼까? 이런 생각도 드는거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늘 한발 먼저 가 있는 친구라고 느껴. 되게 선배 같은 친구이고 실제로 많은 걸 알려줘서 의지도 많이 해. 이 마음만큼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진 않지만 나한텐 그런 존재야.

하와   내가 한 20대 초반 때 노트북을 켜서 한글 문서를 열고 일기 같은 글을 쓸 때가 있었어. 혼자 제목 붙이며 에세이를 썼는데, 그때 ‘닮고 싶은 여자들’이라는 에세이를 썼어. 나만 보는 비밀 일기장 인거지. 그곳에 아까 말한 선생님 이름 적고 내가 왜 닮고 싶은지 써놓았어. 이 사람은 이런게 너무 멋있고 본받고 싶고, 이런 점이 너무 좋고, 그가 나한테 해준 말 적고. 그게 갑자기 떠올라. 웃기다.

무수   대단하다. 그때부터 내가 나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보고 배우려고 했던 거야.

하와   그런게 본능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

무수   진짜 뽐므다. 나는 그런거 없었어. 20대 초반? 그냥 경제학과 들어가서 맨날 경제신문 보고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공부했지. 그땐 재밌었어. 너무 시장주의를 열심히 공부한 것이지만, 학교에선 다른 건 안 알려주니까 도서관 가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야기하는 장하준 교수님 책을 찾아 읽었지. 그때는 내 삶이 정상성 궤도에 들어가길 바랬고, 그 궤도에 들어가면 잘 살거라고 단순하게 여기며 살았어. 그러면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하면 반은 주체적인데 반은 되게 수동적이고 세뇌 당한대로 산 거지.

무수   삶이 꼭 그런게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있어. 만약 임신중지를 했으면 앞으로도 임신하지 않을거란 생각이 있지. 근데 영화 속 사람들의 삶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거야. 그때마다 진심으로 임신중지를 하고 또 임신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거야. 그게 신기했어. 그래서 서로한테 그런 것이 있는지 궁금했어. 

나는 비거니즘을 하면서 느꼈던 거 같아. 비건이라고 하면은 모든 동물성을 거부하고 착취를 반대하는 건데, 난 처음부터 점차 늘려왔거든. 오랜 기간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안로 지냈고 완전 비건이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밖에서 선택지가 없으면 해산물 먹고 잘게 들어간 고기도 남기면 아까우니까 먹고 그래. 지금은 이걸 받아들이고 있지만 순간 순간 내가 타협하고 있나 생각이 들지. 진짜 엄격했을 때는 죄책감도 들고 싫은거야. 한번 거부했으면 매 끼니, 1년 내내 그래야지 왜 안해?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거지. 근데 그럴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하와   나도 먼저 생각난 건 비건이야. 나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 중에서도 채식하는 사람이 있었고 학교에서 환경과 생태를 중요한 학교 철학으로 두고 가르치니까 많은 관심을 가졌지. 친구들이랑 같이 몇 달씩 채식도 해보고. 그러다 간디중학교에서 해외 이동학습을 가는데 내가 졸업생이기도 해서 기숙사 사감으로 같이 가게 됐어. 같이 갔던 사감 선생님인 친구가 완전 비건을 엄격하게 했어. 외국에선 비건하기 더 낫다고 하니까 나도 그김에 같이 했는데 너무 힘든거야. 내 의지도 분명 있지만, 옆에서 엄격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스스로 검열을 심하게 하고, 논비건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몰래 먹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먹으면 죄책감이 들고. 그러고 한국에 와서도 1~2년은 비건을 했어. 

근데 스스로 돌보고 먹이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며 비건을 하니까 너무 영양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야. 건강이 안 좋아져서 한의원에 가니까, 채식하는거 좋은데 조금씩 섞어서 먹으라고 하셨지. 그래서 페스코로 5~6년 오래 지냈지. 일을 바쁘게 시작하며 나 혼자서 안 먹는다고 말하는 게 미안한거야. 지금 생각하면 계속해도 되는데 비건할 때 사람들한테 받은 눈치가 너무 쌓여서 혼자 결정한거야. 사람들이 모였을 때 다 같이 비건으로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 얘기는 못하고 내가 혼자 있을 때나 친한 친구랑 있을 때만 비건으로 먹자고 생각하고. 지금은 논비건도 먹고 플렉서블하게 하고 있어. 근데도 계속 마음에 걸려.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 스스로 허용해주는 것에 ‘이게 맞나?’ 싶으면서 또 끝없이 재단하면 사람들과 자유롭게 섞이고 편히 있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유연하게 있으려고 하지만, 비거니즘을 한다는 건 내 안에서 늘 크고 작은 갈등이 일으키지. 

무수   사회적으로 차별이 있는 건데 그걸 나한테만 엄격하게 검열하고 질문하는 건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에게 되묻지 말자’ 그리고 논비건을 먹었다면 그 다음엔 안 먹으면 돼. 계속 그렇게 하는거지. 

하와   맞아. 내가 지금까지 잘해온 것이 있고 내일도 잘할텐데,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스스로 비난하는 건, 건강하지 못한 것 같아. 

무수   유연하게라도 비건인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비건으로 식사할 장소도 많으면 좋겠어. 그래야 이걸 얘기하고 함께 먹고 지내는게 편하지. 아니면 비건을 하는 순간, 밥을 함께 먹을 관계가 없어지는 거잖아.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되돌리기가 어려워서 더 선택하지 않을거라 생각했거든. 그래서 임신중지를 했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 선택을 고수할거라고 여겼던거 같아. 근데 책 <유럽 낙태 여행>에서 임신중지를 ‘이 순간에는 원치 않는다’고 표현하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원할 때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다는거지. 사실 내가 지금은 원치 않지만 나중엔 원할 수 있는거 잖아. 최근에 임신중지 대체입법 공백 기간에 이를 경험한 여성들의 경험을 분석한 보고서를 읽었는데, 임신중지를 선택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였어. 그럼 경제적인 여건이 괜찮으면 임신을 원할 수 있는거지. 나도 생각을 좀 유연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 사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 임신을 할 수 있느냐 이지. 

하와   한 사람이 지금 처한 환경과 상태에 맞춰 임신을 선택하거나 안할 수 있는 건데, 임신중지는 너무 죄악시 돼 있으니까 이걸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조차 망각할 수 있을거 같아. 스스로도 낙인을 찍게 되니까. 내가 다시 임신을 해도 되는건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적 인식도 신경쓰이겠지.

무수   그 보고서에도 임신중지를 하는 방식의 약 70%가 수술이라고 하더라고. 그 이유가 여성들이 약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이게 확실한지 모르겠는거지. 그래서 가장 확실한 걸 찾는다고 하더라고. 근데 수술 이전에 약물이 우리한테도 안전하고 필요한데, 유산유도제 ‘미프진’이 아직도 한국에 안 들어왔잖아.. 그래도 최근에 이재명 정부에서 미프진 허용과 임신중지 대체 입법 마련을 국정 과제로 언급했더라고. 국회에서도 약물 사용이 가능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이고. 그래서 전보단 이번 정부에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 

하와   이길보라 감독님이 예전에 자신의 임신 중지 경험을 쓴 글이 있었어. 그걸 읽으며 엄청 힘이 많이 됐단 말이야. 이런 얘기는 친구랑도 안 하게 될 가능성이 높잖아. 공인으로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 멋있어서 기억에 많이 남았는데, 최근엔 임신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있어. 임신부터 출산, 양육까지 SNS에 글을 많이 올리시는데 내가 다 저장하면서 진짜 감명 깊게 읽었어. 왜냐하면 그 사람이 과거에 임신중지 글을 썼던 걸 아니까, 근데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고 맘껏 느끼고 누리는 삶을 사는 게 그게 너무 멋있는거야. 아기 사진과 함께 애정을 드러내는 것도 보기 좋고 응원하게 되더라.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 중의 한 명인 것 같아.

무수   그런 사람들이 영향을 주는 것 같아. 알려진 페미니스트들 중에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또 저마다 어려운 점과 또 좋은 점을 나눠주잖아.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주는 게 엄청 귀하지. 가보지 않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고, 내가 더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잖아.

하와   이길보라 감독님이 일본에서 자연주의 출산한 경험도 글로 쓰셨어. 그 글이 감동적이어서 눈물 흘리면서 봤단 말이야. 조산사 선생님들과 함께 출산을 같이 해나가는 이야기였는데, 한국은 자연주의 출산도 별로 없고 인식도 안 좋잖아. 근데 나도 어릴 때부터 뭔가 수술대에서 아기를 낳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그게 가장 깨끗하고 안전할 수 있지만, 모르는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보고 가족들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 근데 자연주의 출산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드니까, 레퍼런스가 없었는데 글을 써주셔서 감사했어. 

하와   어릴 때는 막연하게 싱글맘이 멋있어보였어. 아빠가 필요할 수 있지만, 엄마와 친구들, 할머니, 할아버지와 키워도 된다고 생각했지. 그러고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는 절대 결혼도 안 할 거고 임신도 애도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당당하고 독립적인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내 여자 친구들과 잘 먹고 잘 살거야! 하면서. 그런데 점점 궁금한 거 같아. 주변에 아기를 잘 낳아 기르고 가족을 꾸리고 사는 삶이 별로 없으니까. 내가 쉽게 보는 이들은 연예인인데, 육아 예능도 많고 유튜브에서 자신들이 아이 기르는 걸 보여주니까. 그들의 경우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고 결혼해서 난임으로 인해 시험관,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해 아기를 낳아 기르기도 하더라고. 그걸 보면서 저게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아니겠구나, 싶었어. 어느 순간 임신과 출산은 내가 하고 싶어도 선택하기 힘든 것일 수 있겠더라고. 사회적이나 제도적으로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지원받을 수 있는게 너무 티끌이니까. 나와 비슷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중 아이를 양육하는 분들을 떠올려 보았을 때 이길보라 감독님이나 선과 영이라는 포크 듀오분들 정도? 어떻게 저렇게 사는 건지 궁금했어. 레퍼런스가 너무 없으니까. 내가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고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건 아닌지 막연해. 내게 실체가 더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만약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면 당연히 선택해볼 일이 될거 같아. 근데 나는 임신을 해보고 싶어. 순수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경험일 것 같아서 한번 해보고 싶어. 근데 양육은 좀 무서워. 한 인간에게 내 모든 것이 영향을 준다는 게 두려움이 있는거 같아. 

무수   대학교 때 나도 임신이나 양육에 대한 책을 찾아봤어. 외국은 어떤지 살펴보면서, 내가 뭔가를 결정해야 된다고 느꼈나봐. 우리는 아니지만, 엄마 세대때는 그 나이쯤 결혼을 했으니까. 나도 머지않아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그땐 내가 계획형이어서 내가 결혼을 할거면 임신과 출산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했고, 내가 임신을 한다면 이때쯤은 결혼해야 하는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거지. 근데 내가 진짜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거야. 그래서 책 읽으면서 그 당시에 나름대로 정의했던 것은 ‘임신과 출산을 원치 않는다’. 그후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더 그 방향으로 기울었는데, 지금은 좋은 인연이나 환경이 있다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유연하게 변했어. 근데 나도 두려움이 있어.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존재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으니까 그게 좀 두려워. 내가 여전히 나이가 30살이 넘었는데도 원가족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게 내 평생 영향을 주고 끝나겠다고 느끼고 있어. 그래서 아이를 양육하는데 제도적이나 환경적으로 든든하더라도 난 그걸 선택하기 쉽지 않을거 같아. 

하와   누군가를 어느 기간까지 책임지고 자라게 하는 양육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야.

무수   근데 이런 걸 친구들과 나누는 건 재밌어. 어떤 친구는 자신 안에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랑을 주는 존재로 아이를 상상하고, 어떤 친구는 나와 우리를 기억해 줄 존재가 필요하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삶을 크게 바꾸고 싶어서 아이를 떠올리더라고. 이 이야기를 한 친구에겐 내가 사랑을 자꾸 소유하려고 한다고 말했어. 내 아이, 내 강아지, 내 관계. 소유하지 않아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거 아니냐고. 요즘엔 난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생각해. 그걸 할 수 있을까? 그게 뭘까?

하와   쉽진 않지. 그렇지만 계속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관계 안에서도 다 내 것이길 바라는게 크니까. 하지만 이 사람을, 이 관계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 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뭔가인 거지.

무수   연애, 결혼, 가족 같은 건 내 것을 만드는 사랑 같고,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우정이 소유하지 않는 사랑 같아. 소유하지 않기에 길게 같이 있을 수 있고 서로 어떤 모양이든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거지.

하와   그래서 연애 관계에서도 우정의 마음이 많아지는게 좋은거 같아. 처음에 서로가 너무 좋고 안 보이면 불안하고 이런 때에는 내가 없어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거든. 일시적으로 내가 없고 나와 그 사람이 동일시된 상태. 그러다 점점 천천히 다시 분리되면서 조율하고 편해지며 우정을 다지게 되는 그 시간이 좋아. 우정은 중요한 힘인거 같아.

무수   맞아. 가족이 힘든 건 친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와는 연인이 있잖아. 그 사람이 좋은 친구인가?

하와   좋은 친구 같아. 연애하면 맞춰주려는 편인데 어떤 순간엔 내가 그냥 나인 채로 있어도 괜찮은 관계가 나도 처음인거 같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연습하고 훈련된 것도 있겠지만, 결국은 서로 서로 관계를 다지고 쌓아나간 덕분에 편해진 것이지. 내가 이 일대일 관계에서 편해지는 경험을 하니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나로 있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되는거 같아. 그냥 맞추거나 참기만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거나 휩쓸리지 않고 나대로 있는 힘이 생긴거 같아. 그리고 친구들이 ‘편하게 있어도 괜찮아’, ‘너도 네 이야기 해봐’라고 말해준 것도 힘이 되었지. 또 아르케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가 다른 사람을 신경쓰고 챙기는만큼 사람을 잘 챙기는거야. 그 속에서 나도 챙김을 받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힘이 되었지.

무수   내가 타인한테만 온전히 맞추고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 에너지가 깎일 수밖에 없지. 근데 그냥 나로 존재하면서 관계 맺는 사람들을 만나면 에너지가 생기는거 같아. 우리 벌써 2시간 가까이 이야기 했다. 대화 나눈 소감을 들어볼까? 

하와   너무 재밌어. 또 하고 싶어! 내가 그 순간에 있으면서도 이 순간이 기억에 남을거 같다고 느낄 때가 있잖아.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 

무수   어? 왜 나 울려…

하와   울지 마. 따라운다…왜냐하면 내가 아끼는 영화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여자친구와 얘기한 것이라. 우리끼리 밥 먹으면서 하기는 또 쉽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이 대화가 영화의 장면과도 되게 닮은거 같아서 너무 좋았어. 기억에 오래 남을거 같아.

무수   나도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고, 오늘 대화하면서도 수잔과 뽐므가 우리 모습 같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들처럼 긴 시간 함께 지내는 친구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영화 마지막에 수잔과 뽐므를 포함해 그들과 관계 맺는 사람들이 다함께 명절 같은 시간을 보내잖아. 우리의 미래를 그렸을 때 그런 모습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어.  

하와   둘이 오랫동안 엽서와 편지를 주고 받잖아. 지금은 내가 무수랑 되게 가까이 지내고 있지만 혹시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된다면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어디에 있더라도 긴 시간 계속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존재가 되면 좋겠어. 

무수   울면서 끝나는 대화. 눈물 엔딩…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한번 안아.

하와   눈물 포인트 너무 많았다. 너 내가 할머니 될 때까지 지켜본다!

무수   다음에 또 초대해 드릴게. 내년에 ‘둥그런 옆자리’ 팟캐스트 할 거거든요. 그때 또 나오세요.

하와   좋아요. 더 매콤한 입담으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