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란   이 영화는 활동가의 끝판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근데 나는 그들처럼 못할 거 같거든. 그러면은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의 방식이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이걸 알아야 무리하지 않고 오랫동안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서 활동의 모양을 생각하게 되더라고. 옛날엔 나도 풀뿌리 단체 활동하고, 시위 나가고 연대 활동해야 하나 싶었는데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걸 알고 내 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잠시 멈췄거든. 그래서 궁금했어. 무수는 본인이 완성되었다고 느끼는지? 또 다른 추구미가 있는지?

무수   완성되었다고 느끼진 않아. 사실 활동이 그런 모양으로 많이 나오잖아. 격렬한 퍼포먼스를 하고 현장에 있는 모습으로. 그게 각인이 되어서 그걸 안 하는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었어. 내가 용기가 없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활동을 못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지. 근데 지금은 활동을 직접 만들고 하면서 느낀 건, 활동의 모양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야. 우리가 어떤 것만이 활동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되게 잔인한 장면으로 경각심을 줄 수 있고, 목소리를 크게 외쳐서 말할 수도 있는데, 나는 누군가를 놀라게 하거나 네가 잘못했다고 평가와 비난에 가둬서 사람을 바꾸고 싶지 않아. 그걸로 사람이 바뀌기 어렵다고도 생각해.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닌 거지. 내가 하는 건 햇살. 햇살을 비춰주면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내고 서로 온전히 얘기를 듣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당연히 이 문제에 공감할거라 생각해. 지금은 서로 너무 많은 옷을 입고 틀이 단단해서 들리지 않는 거야. 근데 이게 잘 들린다면 공감을 안 할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이 있어.

혜란   햇살이 얼마나 세야 하는 거야? 햇!볕! 해야지. 여름 햇볕!!!

무수   뜨거운 햇볕이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걸 하고 싶어. 그래서 모어데즈를 만드는 방식도 그렇고 나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이렇게 모보이스 뉴스레터든 라이츠 모임이든 협업할 사람들의 자리를 더 많이 만들고 초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가.

혜란   맞아. 근데 너무 잘하는 것 같아. 기질적으로 잘 맞아 보여.

무수   그 방식이 나랑도 잘 맞아서 많이 힘들지 않게 할 수 있는 거 같아. 나와 잘 맞는 것에 활동을 붙이는 것이 소진되지 않은 방식이지.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혜란   맞아. 채식도 똑같지. 한 사람이 엄격한 채식을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조금씩 함께 하는 게 낫다고 말하잖아. 완전 공감하거든. 근데 나는 활동이라는 말에 선입견이 있고 거기서 내가 항상 부족한가, 괜찮은가 판단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활동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조심스럽고 스스로 붙여도 되나 검열하게 되지. 이도 저도 안 되는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예전에 기본소득 단체 BIYN 활동할 때는 ‘저도 활동가죠!’ 하면서 말했는데, 지금은…

무수   왜 그렇게 달라졌어?

혜란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하는 건 회피고, 회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회피고. 옛날에는 활동이 내 인생의 쓸모를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 나는 처음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도 돈을 버는 게 목표라기보다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풀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방식으로 하니까 커리어적으로는 내가 되게 뭘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공익을 위한답시고 결국 나만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러면서 건강하게 달라졌어야 했는데 실은 거의 반대급부처럼 그냥 놔버린 거야. 너무 극단적이지. 실은 비영리조직을 다니는 것도 누군가는 활동가 같다고 말할 수 있잖아. 근데 나는 어떤 면에서 죄책감이 드는 거지. 내가 도망쳐 왔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소진됐던 이유는 일하는 곳에서의 안정감이 만들어지지 않고 불안감이 계속되니까 떠난 것인데. 활동을 왜 떠났냐고 하면, 활동이 나한테 더 이상 어떤 긍정적인 베네핏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거 같아. 슬픈 얘긴데 이런 얘기 담지 마.

무수   담아야 해. 그게 활동이랑 일이 붙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사실은 분리할 수도 있는 거잖아.

혜란   분리도 했었지. 회사 다니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 하고  활동가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분리해서 사는 것도 불안한 거야. 실은 불안하니까 활동한 것이기도 하거든. 그게 이 사회에서 내 쓸모를 찾아야 한다는 불안감. 회사 안에서는 쓸모 찾기가 쉽지 않고 근데 내가 관심 있는 문제에서는 뭘 하든 쓸모를 느낄 수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 조직 안에서 쓸모가 없어서 불안했던 것을 사이드로 풀었는데 이것 또한 인생의 안정기를 만들어주지는 못하니까.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이 불안함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뭐가 필요하지, 그냥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한가 생각이 든 거지.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모르겠어.

무수   불안하니까 뭘 자꾸 만들었구나.

혜란   경제적 불안이 아니라 이 쓸모에 대한 불안. 내가 사회에 진짜 쓸모가 있는 사람이야? 일이 지금 되고 있어? 이 일이 진짜 쓸모 있다고 느껴? 효능감을 느껴? 세상에 도움이 돼? 여러가지 질문이었던 것 같아.

무수   지금은 어때? 쓸모가 있는 것 같아?

혜란   아니. 마이너스라고 생각해. 실은 활동을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거든. 옛날에는 내가 어떤 사회적인 위치가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으니까. 지금 뭔가 더 하면 파급력이 커질 거 같아. 그러니까 하면 되거든. 근데 이것도 회피지. 그냥 회사가 바쁘다는 이유, 이게 내 삶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 하는 거야. 나는 활동으로 세상을 지키고 싶다고 했지만, 그냥 나를 구원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근데 구원이 안 되니까 그냥 손을 놔버린 거야. 이거 진짜 부끄러운 얘기야. 나를 구원한다는 게 뭔지, 어떻게 구원이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계속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가 내 미래에 안정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줄 거란 기대가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것 같아. 되게 별로지. 뭔가 공공을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내가 자본주의적인 안정감을 얻고 싶고, 되게 전문성 있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나.

무수   활동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변했구나. 그 말이 슬프기도 하고 또 당연히 우리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활동을 하면서 혜란이 얻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 나는 활동을 하면서 내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느낌을 받아. 내가 문제라고 느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내 삶 자체를 소외시킨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 활동하니까 주체성이 생기고 작더라도 스스로는 뿌듯한 게 있어. 그리고 이걸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환경이 되는 거지. 내가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낯선 나를 단번에 환대를 해주는 건 내가 해왔던 활동 덕분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 관계가 좋은 거야. 내가 얻는 건 그런 거야. 나의 주체성, 좋은 환경을 위해 활동을 하는 거지. 그래서 혜란도 분명히 활동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그걸 찾아보면 좋겠어. 활동이 구원해 주지 않으면 진짜 아무것도 구원해 줄 게 없어.

혜란   내가 너무 방식을 몰랐던 거지. 나를 소진시키면서 뭐라도 될 수 있는 것 마냥, 내가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처럼 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 그땐 더 초조했으니까.

무수   활동으로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이 지치기 쉽다고 말하잖아. 나도 그런 마음이 있지만 엄청 크진 않고 이걸 하고 있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아.

혜란   나는 결과가 빨리 나와야 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지치는 거야.

무수   결과가 빨리 나올 수가 없어. 우리 하는 활동이.

혜란   이 지구가, 지금 기후 문제가 바로 어떻게 되겠어? 나는 지금도 기후 환경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으니까. 그때 중요하다고 말했던 게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넘으면 안된다’. 근데 2024년에 이미 넘었고 이제 와서 중요하다고 말하면 어떡해? 그때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이 최근 5~10년 사이에 계속 이야기 나오니까 어쨌든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그때 뭐라도 안 했으면 지금의 결과가 더 괴로웠을 텐데 어떻게든 변화한다. 근데 조금 더 촉진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당장 내 일이 급하니까 모르겠다 하고.

무수   그때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거야. 그게 없었다면 지금도 못 해.

혜란   맞아. 논의가 발전해 왔어. 그래서 지금도 환경 문제 얘기하는 사람 잘 못봐. 나는 이제 그 활동을 안 하니까, 도망치고 빠져나온 사람으로서 미안함이 진짜 큰 거 같아. 

무수   부채감이 있구나.

혜란   다시 뭘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옛날에는 의무감으로 뭘 했다면 앞으로는 진짜 살에 가깝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나는 서핑이나 수영하면서 바다가 너무 좋아졌으니까 오히려 해양생물에 관해 목소리를 낸다던가. 옛날에는 큰 의제 안에서, 도시적인 방식으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얘기했다면 이제는 현장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초조해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마음에 들어와서 진짜 할 수 있을 때 하자고 생각해. 그래야 진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거 같아.

무수   그래. 소진되면 못 하지. 나는 더 지역적인 걸 하고 싶어. 내가 있는 동네, 내가 사는 곳에 관한 활동.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모르는데 서울 얘기는 많이 알고, 오히려 한국은 어떤지 모르는데 지구에 관해서는 얘기하는 것도 있잖아. 내가 살고 있는 땅이나 환경을 잘 알고 같이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혜란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포스터이기도 한 그 장면이 좋았어.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나. 활동이라는 게 맨날 인상 구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기쁨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게 나한테 주는 시사점이 많았던 것 같아. 그때 내가 골똘하면서 인상 쓰고 생각했었으니까. 진지한 문제를 웃으면서 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하구나. 행복해 보이지 않아?

무수   행복해 보여. 활동 현장에 가보면 웃는 순간도 되게 많잖아. 근데 그걸 주목하거나 기사화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그 자리에선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노래 부르면서 얘기하는 순간이 많아. 그때 탄핵 집회했을 때도 케이팝 틀어가면서 신나게 흔들고 활동했잖아. 현장에선 느껴지는데 이게 약간 거리감이 있는 사람한테는 보이지가 않는구나 싶어. 그래서 내가 현장에 갈 때는 그걸 알려주려고 하거든. 내가 느낀 현장의 기쁨, 좋았던 순간들을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야겠다. 엄숙하고 힘든 문제도 우리가 같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걸.

혜란   어떻게 곧 죽을 사람이 그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어? 자기의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특히 그 당시의 에이즈 환자는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내가 나를 존중하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나라면 못했을 것 같아. 오히려 나에게 어떤 압력이 없는데도 스스로 너무 작아짐을 느끼는데 한 인간으로서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 공동체의 힘인가? 근데 나는 같이 간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무수   난 반대로 한 개인은 너무 작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뭉치거나 합쳐야지 힘이 생기는 거 같아. 그리고 영화 보고 찾아봤는데, 보통 HIV랑 에이즈랑 같이 엮어서 얘기하잖아. 근데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고 에이즈는 HIV 감염자 중에서도 면역 체계가 무너져 힘든 사람을 에이즈라고 하더라고. 그 차이가 있어. 그래서 HIV 감염인은 관리하면 충분히 일상생활이 문제가 없다고 그래. 나도 잘 몰랐는데 찾으면서 알게 되었어.  

혜란   나도 몰랐네. 한국에 에이즈 환자가 몇 명인지 찾아볼게. 2024년 기준 1만 9천 명? 너무 적은데?

무수   사람들이 낙인 때문에 치료를 안 받아서 그럴 거 같은데, 특히 한국에서 커밍아웃도 안 하는데 치료를 받기 쉽지 않잖아. 

혜란   대학생 때 데이터 관련 수업에서 교수님이 ‘고소득층이 암이 더 많이 걸린다’라는 결과를 보여주고 무슨 함정이 있냐고 물어봤었거든. 결국엔 저소득층은 병원도 가지 못한다는 함정이 있었던 거지. 그때 그걸 듣고 대박!, 내가 이런 사각지대를 놓치고 데이터는 모든 걸 증명해 주고 진실하다고 믿으면서 살았다고 느꼈지. 데이터에 대한 리터러시, 매체에 대한 리터러시가 생긴 거지. 근데 내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프레임대로 사고하면 ‘역시 암은 고소득이 많이 걸리는구나. 그럼 저소득층 괜찮은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무수   옛날에 대학교 2학년 때인가, 학술대회 논문 같은 걸 썼거든. 그때 주제가 노조가 있는 회사와 노조가 없는 회사의 임금 격차를 분석하는 것이었어. 데이터를 엄청 돌리고 했는데 크게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거야. 논문으로 쓸 정도로 두드러지지가 않은 거지. 그래서 지도 교수님한테 이야기했더니 되게 심드렁하게 ‘그러면 성별로 나눠봐’ 이러는 거야. 그때는 내가 무지해서 저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 근데 성별로 나누니까 뚜렷하게 뭐가 나왔거든. 지금 생각하면은 맥락이나 사회구조를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성별로 나눠 보라고 하는 교수의 무심한 태도와 무지하게 성별을 도구로 활용했던 나. 진짜 여러가지가 뒤늦게 스쳐 갔었어. 

혜란   근데 교수님 어떻게 코멘트를 한 문장도 안 붙여. 그래서 무수의 논문의 결론이 뭐였어?

무수   예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노조가 있는 곳이 임금이 확실히 높아지고 그 안에서도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결괏값이 나왔던 거 같아.  

혜란   성별 격차는 있는데 노조가 있으면 격차가 덜하고 노조가 없으면 격차가 더하다.

무수   맞아. 노조가 있으니까 하방 보호가 되는 거지. 성별 구분을 안 둘 때는 노조가 있든 없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나눠 보니까 차이가 보이는 거야. 미쳐.

혜란   창피하다. 근데 교수님이 진짜 별로인 것 같아.

무수   이들은 정말 생존의 문제잖아.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제약회사에 저항해야하고. 그래서 활동의 모습들이 더 격렬하게 나온다고 느끼거든.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나? 나는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페미니즘 집회 나갔을 때 이런 마음이긴 했었어. 나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문제라고 느꼈지. 그래서 혐오의 말을 돌려주는 미러링 같은 걸 많이 했잖아. 지금도 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그땐 필요하다고도 생각했었어. 그게 격렬할지라도. 활동을 하게 된 것도 페미니즘 때문이니까.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든 명예가 있든 이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성이 바뀌지 않으면 내 일상이 달라질 수 없겠구나 느끼고 활동한거지.

혜란   나는 기후 활동할 때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이상으로 오르면 안 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 공포감을 조성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느꼈거든. 이 티핑 포인트를 넘으면 끝이다. 그래서 그 활동을 진짜 열심히 했어. 인류에게 닥치는 엄청 큰 재앙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거야. 나는 미치겠는데 아무도 관심 안 가져주니까. 결국에는 1.5도가 넘었고 그 결과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데, 어떤 마음이냐면 '봐봐. 그때 말할 때 잘 듣지 그랬어. 덥다고 징징대지 마' 이렇게 되는 거야. '너희가 그때 말할 때 안 들었잖아. 너희가 했잖아.' 실은 나도 가담하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모르겠어. 시니컬해지고 남 탓하고 싶어.

무수   이건 진짜 넘으면 안 되는 건데 이미 넘어버렸어. 그럼 어떻게 해?

혜란   다 죽는 거야. 이제 와서 기후 문제 해결하겠다고 난리 치면 뭐 해. 근데 이게 엄청난 우월감이기도 하다. 나는 먼저 알았고 너희가 그때 안 했고, 죄책감을 묻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야. 근데 나도 조금 한 거 갖고 했다고 생색내는 거잖아. 되게 이중적인 거야. 인간 사이에서의 우월감을 느끼고 싶으니까. 근데 이게 잘 작동하면 좋은 힘이 되는 것 같고 잘못하면 그냥 무시하는 용도로 쓰이지. 

무수   그래서 환경에서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방식이 좋더라고. 그 사람도 다 알지. 지금 1.5도 넘은 것도 알고 끝장난 것 아는데, 그럼에도 희망을 주거든. 어떤 식이냐면 자연을 그대로 뒀을 때 그 회복하는 속도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니 지금도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거든. 그게 낙관을 주면서 행동하게 만들어줘서 좋아.

혜란   맞아. 나 최재천 교수님 진짜 사랑해. 그런 말하기와 커뮤니케이션을 나도 하고 싶지. 그리고 누군가한테 죄책감을 주는 방식으론 큰 영향력이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것.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베네핏이 돌아와야 움직이는 존재잖아. 도덕적으로 잣대를 들이밀면 움직여지나?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든. 큰 판을 만들려면.

무수   그래서 나도 개인적으로 활동으로 하는 건, 한 인간에게 내가 인간으로서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데 되게 어려움이 많잖아. 기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러면 내가 그 옆에 있는 존재로서는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나의 활동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좀 더 베푸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돌봄이 나한테 활동인 거지.

혜란   맞아. 너무 큰일 한다. 근데 어렵다. 왜냐하면 난 활동할 때 그럼 범위가 얼마나 넓냐고 물어보기도 하니까. 그럼 무수가 하는 돌봄의 활동이 범위가 얼마나 넓어? 얼마나 영향력이 커? 이러면 받은 사람이 움직일 때 그 영향력이 생기는데, 나는 맨날 돌봄을 받지만 아무것도 안 하잖아. 그럼 이게 뭐지?

무수   언젠가 일어나겠지. 당장 짧은 시간에는 무언가 달라지지 않아도 긴 시간을 보면 변화가 있을 거로 생각하거든. 내가 만약에 버스 기사님한테 인사하면 기사님이 노동하는 동안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이건 당연히 영향이 있지. 임팩트가 클지는 잘 모를 수 있지만 넓게 퍼질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해. 혜란도 마찬가지야. 많은 사람 만나잖아. 그 사람들과 작은 다정을 잘 주고받으면, 그게 쌓여서 한 사람이 받은 사랑은 엄청 많아지는 거잖아. 근데 우리는 꼭 어떤 관계에서만 주고받고, 아무 관계가 아닌 사람한텐 아무것도 안 주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낯선 이들을 더 많이 만나잖아. 그러니까 사회가 나아지기 위해선 다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단 내가 먼저 해보는 거지. 매번 실천이 어렵지만, 누군가를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고 뭔가를 해줄 수 있도록 하는 거지. 

혜란   최근에 책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읽었어. 여기서 말하는 건 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이야. 이 책에서 이런 말이 있거든.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선의를 놓치고 맙니다. 정확히 말해서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 이상 발견하지도 눈치채지도 못하도록 건네집니다. 사랑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정체를 숨긴 채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이미 도착한 편지를 다시 읽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누군가한테 증여받았다는 걸 잊지 않고, 그것을 타인에게 또 증여하는 게 필요한 거지. 받은 게 있으면 줘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책이었어. 그렇기에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낀다.

무수   내가 감사 일기에 쓰는 것 중의 하나가 살아있으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야. 엄청난 사랑을 받지 않으면 우리가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거든. 왜냐하면 거리에서 죽을 수도 있고 차에서 치일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큰 사랑을 받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다면 충분히 베풀어야 하는 거지.

혜란   아주 증여를 잘하는 사람이야. 나는 받은 건 진짜 많아. 주변에서 정말 많이 받아.

무수   혜란도 혜란의 방식대로 잘 나누고 있어. 더 할 수 있는데 못해서 아쉬운 거겠지. 차차 해나가면 돼. 우리가 이렇게 거의 2시간 넘게 이야기했는데 소감이 어때?

혜란   더 파격적으로 얘기 많이 하고 싶은데 모자란 것 같아. 자본주의에 대해 나눠야 할 거 같은데. 나는 결국 활동은 자본주의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해.

무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대화가 어땠냐고. 마무리 멘트야.

혜란   무수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지. 재밌는 건 무수가 나랑 매번 생각이 같진 않거든. 그래서 참 많이 배우는 것 같아. 각자의 방식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나한테 엄청난 신뢰감을 주는 것 같아. 그게 결국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내가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는 믿음, 자신감이 생기는 거지. 요즘은 뭔가를 몰입해서 진심으로 대하고 있지 못하니까 오히려 무수가 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배우고 따라가고 싶은 것도 있어. 내가 생각이 없을 때는 그냥 무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거든. 이게 맹목적으로 좋다고 할 순 없지만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면 그냥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좀 이기적인가?

무수   내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었나? 혜란한테 너무 많은 영향을 주는 거 같아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네. 그래도 믿어주면 고맙지. 나에게 혜란은 이 세상에 사는 혼란함을 가장 많이 나눈 친구야. 그래서 이 자리에 꼭 초대하고 싶었어. 그리고 오늘 대화로 그간 일의 경로, 삶의 경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내가 더 세심하게 듣고 나눠서 혜란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어. 공감도 많이 했고.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